복잡한 곡을 쓰는 마음가짐

 

질문함에 질문 감사합니다~
트윗 하나에 답변하기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일루 옴.

 

 

 

전개가 복잡한 곡은 뭔 생각으로 쓰느냐!

 

대전제가 있어요. 어떤 긴 소리가 음악으로 기능하려면, 반복과 거기서 오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.

안 그러면 그냥 소음이잖아요 그죠?
킥이 일정한 간격으로 두번 세번 나와야 "아 2초전에 들어본 리듬이라 익숙하구만" 하면서

그루브를 탈 수 있잖아요. 그런거임.

 

복잡한 곡을 쓸 때는, 한번 판을 벌려놓고 나서 위 대전제를 만족할 때까지 수습의 연속입니다.

 

 

 

두미튠즈같은거라고 하셨으니 그걸 예로 들면,

딱 첫마디 기타 리프를 쓴 순간

더 새로운 악상을 떠올릴 여유가 없습니다. 왜그냐면 (장문주의)

일단 13/8박이란거가 정말 무질서하고 익숙치 않기 때문에,
청자한테 최대한 반복학습을 시켜야 상황파악이 되고 좀 익숙해지죠.

  > 변박곡이고 뭐고 처음 정한 박자를 얼마간은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 정해짐

 

13/8 고정입니다. 18마디 동안 반복학습합니다.

 

코드진행도 무질서에 무질서가 겹쳐 카오스가 되는 일을 막아야 하니까

이미 모두에게 익숙한 12-bar 블루스로 밀었습니다.

 

첫 두 마디가 C가 아니긴 한데 인트로에선 C였거든요 그니까 얼추 맞는걸로 합시다 ㅇㅋ?

  > 코드진행이 정해짐

 

박자 분배도 당분간 3+3+3+4로 강제 고정이죠. 이 최소한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, 몬가 전환이 일어나는거임
어짜피 전환하는 것 임팩트를 실어주기 위해 코드라도 쌓아야죠...그래서 쌓고

 

  > B파트로 넘어가는 방식이 정해짐

상기 이유로 열몇 마디를 죽자고 달렸으니까 대조/숨돌리기를 위해 다음 파트에서는 분위기를 착 빼줘야 하는 거고
  > B파트의 분위기까지 정해짐

최대한 대조를 위해 스윙 리듬으로, 장르도 재즈로 바꿨는데
계속 진행하면 이게 락 내지 피코팝이 아니게 되어버리잖아요?
대전제 쌍싸다구 때리고 산으로 갈 게 분명하니까 진짜 최대한 빨리 수습해야함
  > 강제로 허리 끊어버리고 익숙한 A파트로 귀환하는 것까지 정해짐

 

하하 이제 수습된줄알았지???

아뇨 보컬곡이니까 당연히 후렴이 있어야 하고, 분위기도 A파트보다 띄워야 합니다.
  > 곧 A파트보다도 더 큰 깽판을 치는 것이 또 정해짐

그러면 후렴은~
  > 강제로 불협화음을 박아서 개판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까지 정해짐 (이거 따왔습니다 히로미최고)
  > 이러면 대전제에서 또 저만치 벗어날테니 n/8박 대신 n/4박으로 (그나마) 단순화하는 게 정해짐
  > 후렴에 할당가능한 시간도 짧은데 최대한 빨리 질서를 재정립하기 위해 1마디짜리 반복을 쓰는 게 정해짐
  > 그래도 난장판이어서 보컬라인도 복잡하게 못하고 단음 샤우팅하기로 정해짐

 

 

 

ㅏ.

곡이 대전제에서 벗어나려고 하는 움직임을 블로킹하다 보면 많은 것들이 알아서 정해집니다.
자유롭고 창의적으로 아무런 악상을 떠올릴 여유같은 게 없어요.
스노우볼이 굴러가는 걸 어떻게든 수습 수습 수습만 해도 벌써 1분 넘게 찹니다.


간주에 빰 빠가밤~~하는 빵빠레를 넣고 싶은데 판을 딱 한번만 더 벌려볼까?
^^^ 이러면 2절써야되고! 2절이니까! 앞에서 썼던 멜로디/코드/악기를 최대한 재활용해야겠죠?

또 뭐가 정해졌네! 그래야 질서고 대전제에 부합하니까!! ㅏ!!!

 

수습(=반복과 질서와 익숙함)을 위해 멜로디를 재활용하는 모습

 

또 정해짐 대잔치하다가 어떻게든 수습이 되면 또 1분 늘어나서 어떻게든 아웃트로 넣고 곡을 끝냅니다.
내가 떠올린/가져온 아이디어/악상이래봤자 몇 개 없는데 곡이 끝나 있는거죠.

이런 마인드로 복잡한 곡은 씁니다.

 

 

 

 

<요약>
전개가 복잡한 곡을 쓸 때는, 내가 아무렇게나 떠올릴 수 있는 악상이 100개라고 해도
만들어지고 있는 이 개판이 어떻게든 음악이 되도록 수습하는 데 쓸 수 있는 선택지가 한두 개로 강제되어서
그걸 따라가면 곡이 나와 있습니다.

것봐 세줄요약만쓰면 막줄이엄청 기만자같이 나온다니까? 그래서 할 수 없이 길게 썼습니다.